20년 이상 근속한 공직자에게 제공되는 열흘 동안의 장기근속휴가를 아직까지 써먹지 않고 있었다. 모처럼만에 짬을 내어 중국 여행일정을 잡았다. 4박5일 일정으로 2006년
6월 5일 출발해서 6월 9일 돌아오는 상품을 윤주원 씨네와 함께 부부동반으로 인터넷을 통해 하나투어에 예약을 했다.
북경, 만리장성, 장가계, 원가계를 관람하는 코스다.
닷새동안 함께 할 일행은 26명이다. 가이드 ‘서유정’씨의 안내를 받아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 동부지역은 시차가 우리나라보다 1시간이 늦다. 비행기를 타고 나서 시계바늘을 뒤로 한 시간 돌렸다.
북경 공항에 도착하자 현지가이드 ‘이성식’씨가 대기하고 있다. 조선족인 이씨는 한국말과 중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고 오랜 경험으로 여행지의 역사적 배경부터 소상하게 설명을 해 주니 큰 도움이 된다.
중국의 현재 인구는 13억~14억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면적은 한국의 98배이고 省이 23개, 민족자치구가 5개, 특별 행정구역이 2개(홍콩, 마카오)로 총 행정구역은 34개이다. 우리 팀이 여행할 지역은 중국 전체 지도 중에 빨간색 원으로 표시한 북경, 천진 지역과 호남성 장가계지역이다.
자금(紫禁)이란 북두성(北斗星)의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이 천자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말로, 베이징의 내성(內城) 중앙에 위치한다. 1407년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가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기 시작할 때부터 건립하여 1420년에 완성하였다. 그후 명·청 시대를 통하여 궁전과 궁문을 여러 차례 보수·개축하였으며 명칭도 바뀌었다. 남북 약 1,000m, 동서 약 760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1구획으로 둘레에 도랑을 파놓았다. 성벽 주위 4곳에 각각 1개씩의 궁문이 있는데, 남쪽의 오문(午門)이 정문으로서 특히 웅대하며, 동쪽을 동화문(東華門), 서쪽을 서화문(西華門), 북쪽은 신무문(神武門)이라 부르며 네 모퉁이에 각루(角樓)가 서 있다.
바깥부분, 즉 외조(外朝)의 북쪽은 황제의 사적인 생활을 위한 내정(內廷)으로서 보화전 북쪽에 있는 건청문(乾淸門)으로부터 그 중에서도 측백나무 두 그루가 중간에서 한데 엉겨 붙은 나무들이 있는데 백년 해로를 상징하는 나무라하여 인기가 높다. 빼 놓을 수 있나 한 방 박아야지. 9,999.5칸으로 1만 칸에서 0.5칸이 적다. 그 이유는 1만칸 이상을 소유할 수 있는 자는 유일하게 天帝뿐인 고로 天子인 皇帝는 그보다 규모가 적은 것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중국 전통예술 써커스를 관람 후 하룻밤 묵을 호텔은 구화산장(九華山莊)호텔이다.
만리장성은 중국 역대 왕조가 변경을 방위하기 위해 축조한 대성벽으로써 발해만(渤海灣)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이나, 실제는 6,350㎞(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 유적이다.
춘추시대 제(齊)나라가 영토방위를 위하여 국경에 쌓은 것이 장성의 기원이며 전국시대의 여러나라도 이에 따랐다.
진(秦) 시황제(始皇帝)는 중국 통일(BC 221) 후 흉노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 남부로부터 북으로, 황하강(黃河江)의 대굴곡부(大屈曲部)의 북쪽을 따라 동으로 뻗어나가, 동북(東北) 지구의 요하강(遼河) 하류에 이르는 장성을 쌓았는데, 절반 이상은 전국시대의 연(燕)·조(趙) 등이 쌓은 장성을 이용한 것이었다.
당초 토성으로 축조하였으나 기간이 지남에 따라 무너져 내린 것을 명나라 시대에 돌로 보수한 것이 현재 남아있는 것이다.
오늘 관광하는 지역인 팔달령〔八達嶺〕 근처의 장성은 높이 8.5m, 두께는 밑부분 6.5m, 윗부분 5.7m이며, 위에는 높이 1.7m의 연속된 철자형(凸字形) 담인 성가퀴(城堞)를 만들고 총안(銃眼)을 냈고, 120m 간격으로 돈대(墩臺)를 만들어 군사의 주둔과 감시에 이용하였다.
청대(淸代) 이후에는 군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본토와 만주·몽골 지역을 나누는 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하게 되었다. 황사로 인해 시야가 좁아 먼 지역까지 조망을 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이어서 영락제의 무덤인 장릉 관람길에 올랐다.
명나라 국도를 북경으로 옮긴 뒤 북경에서 40여 km 떨어진 하북 창평(昌平)의 천수산(天壽山) 아래에 남북 약 9km, 묘역은 제전(祭殿), 방성명루(方城明樓), 보정(寶頂 : 지하궁전 위 분구<墳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전인 능은전(稜恩殿)의 건축양식은 고궁 태화전과 매우 유사하고 그 면적도 태화전과 같다. 입구에 ‘어린이여러분! 나보다 키가 큰 사람은 표를 사가지고 입장하세요(小朋友.. 比我高的請買票)’라고 씌인 그림 안내판이 이채롭다. 천진공항에서 무슨 이유인지 40분을 지연하여 19:00에 이륙한 국내선 비행기는 2시간을 넘게 남쪽으로 날아가 장가계 허화공항에 도착하였다.
이 지역은 현지 가이드 ‘최경평’양이 기다리고 있다.
장가계국제호텔(張家界國際大酒店)에서 하루밤을 지낸 후,
아열대기후 지역으로 한달에 20일 정도는 비가 내린다고 하는데 다행이 우리 일행이 머무는 3일 동안 비교적 쾌청한 날씨를 보였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연평균 기온이 16.8°C로써 난방을 할 필요가 없으므로 집에 굴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습기가 많으므로 3층 집을 지어 1층은 허드렛 창고 등으로 활용하고 2층이나 3층에서 거주한다. 장가계의 관광은 버스를 타고 가면서부터 시작된다. 깎아지른 듯한 천야만야한 절벽이 차창의 좌우에 전개되는데 이름하여 ‘백장협’이라 한다. 겨우 차들이 교행을 할 정도이기 때문에 차를 세워놓고 관람할 처지가 못되므로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볼 수밖에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이 호수를 올라갈 때는 밋밋한 포장길로 올라가는데 걸음이 불편한 사람을 위해 2인 1조의 인력거 꾼들이 대기하고 있다. 만원! 만원! 땀을 뻘뻘 흘리며 호객을 하고 있다. 편히 구경을 하는 것도 좋지만 안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보봉호의 진면목은 유람선을 타고 30여분간 돌면서 감상을 하게 된다.
점심식사 후 천자산 코스 관람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 관망을 하게 되어있는 코스에는 옛날 진시황이 이곳에 와서 그림을 그리려고 하다가 이 경치에 미혹되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붓을 집어던졌는데 앞에있는 뾰족뾰족한 바위돌로 변했다고 해서 어필봉(御筆峰)이라고 명명된 기암과 중국 10대 장군 중의 한 사람인 하룡장군을 기리는 뜻으로 세운 하룡공원에 강택민 당시 국가 주석이 친필로 쓴 ‘賀龍公園’ 석물표식 등 볼거리가 산재해있다.
아름다운 절경에 정신을 잃는다는 미혼대(迷魂臺)며
천하제일교 좌우측 난간에는 사랑하는 연인들이 사랑의 자물통을 잠가놓고 열쇄는 천야만야한 바닥에 떨어뜨려 영원히 사랑을 해체하지 못하도록 기원하는 의미로 자물쇠를 잠가놓아 온통 자물쇠 투성인 것 또한 볼거리다. 하산은 326m나 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다. 그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데 채 일분이 소요되지 않는 것 같다.
오늘의 일정은 호텔에 들러 발맛사지를 받는 것으로 종료다.
6월 8일 어느덧 중국관광 4박 5일 일정도 오늘로 실제 관광은 마지막이다.
맑은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속에 석회 성분이 굳어지는데 수만년이 걸렸을텐데 아무 생각 없이 종류석 끄트머리 하나 뚝 잘라가는 몰상식한 사람들도 있었는지 간혹 몽댕이 종유석이 보이니 한심한 일이다.
2005년 9월 13일 세워놓은 표석에 씌여있는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땅의 중심으로 통하는 문 - 용왕담(龍王潭)"
(地心之門 - 龍王潭 龍王潭, 因潭水與龍王洞相連而得名. 水面有2,680多平方米, 四周石壁陡峭. 一年四季水位保持不變, 但, 有時隨看月圓月缺而大幅潮漲潮落, 人稱 "陰海..........") 라고 기재가 되어 있으니 인천앞바다가 달의 인력에 의해서 밀물이 되었다가 썰물이 되어 쑥 빠져나가는 이치나 마찬가지 현상이 이 용왕담 호수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정교하지는 않지만 그 규모만은 상당히 큰 것이 일체 못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니 공은 많이 들인 듯 싶다.
나무에 매어있는 붉은 천은 이 나무가 영험하여 자기의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고 해서 온통 붉은 천으로 치장되어 있다. 하나에 '천원'. 나도 하나 걸어놔야지.
석식 후 장가계 허화공항으로 이동하여 천진에 도착 천진천우호텔(天津天宇大酒店)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뒤 이튿날 인천공항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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