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유래

  • 한국인(韓國人)의 성씨(姓氏)

    1. 성씨(姓氏)의 의의(意義)
  •   혈연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우리 민족은 누구나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한 각기의 성씨(姓氏)를 갖고 있으며, 각 성씨 별로 씨족의 역사를 갖고 서로 융화하며 협동·발전하여 왔다.

      특히 조상 숭배사상(祖上崇拜思想)과 애족사상(愛族思想)이 강한 우리들은 성씨를 통해 선조들의 유현(幽玄)한 여운(餘韻)을 느끼고, 면면히 내려오는 가통(家統)의 맥락을 더듬으며 조상의 얼과 체취를 느끼는 동시에 가문에 대한 강한 긍지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성씨의 성장과정(成長過程)은 문명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사회적·심리 적·정치적 역학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2. 성씨(姓氏)의 유래(由來)
  •   성씨의 발생근원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상세히 알 수 없으나, 대략 중국 성씨 제도의 영향을 받아 고조선(古朝鮮)시대에 왕족(王族)에서부터 사용한 것으로 전해온다.

      고대 씨족사회로 접어들면서 그 집단을 통솔하는 지배자가 나타나는데, 통솔에 필요한 정치적 기능을 부여함에 있어서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呼稱)이 성(姓)으로 나타나고, 점차적으로 지방세력이 중앙귀족화 되면서 다수의 부족을 통솔하기 위한 칭호이며, 정치적 신분을 표시하는 중요한 의미로 나타났다.

      따라서 성(姓)은 초기에 왕실이나 귀족에서만 국한되어 사용하다가, 국가에 공이 큰 공신들이나 귀화인(歸化人)들에게 세거지역(世居地域)이나 강·산의 명칭을 따라 사성(賜姓)을 하면서 확대되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반서민들의 성씨 사용은 과거제도가 발달되는 고려 문종(文宗 1047) 이후에서부터 보편화 되었으며, 상민(常民)과 노비(奴婢)를 포함한 모두가 성을 갖게 된 것은 조선말 개혁정치가 시행되면서 부터이다.

    3. 성씨(姓氏)의 득성과정(得姓過程)
  •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 본기1(三國史記第十三卷高句麗本紀一)에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은 고구려를 건국하고, 고()씨를 자기성으로 하였으며, 건국공신인 재사(再思)에게는 극()씨를, 무골(武骨)에게는 중실(仲室)씨를, 묵거(默居)에게는 산실(山室)씨를 사성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23권 백제본기1(三國史記第二三卷百濟本紀一)에는 백제의 시조(始祖) 온조(溫祖)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부여(扶餘)씨로 하였으며,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는 기원전 57년 양산(楊山) 기슭 나정(蘿井)옆에 있는 숲속에서 표주박 같은 커다란 알에서 탄생 하여 표주박 박()씨를 성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는 65년 탈해왕 9년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속에서 금함(金函)으로부터 나왔으므로 김()씨라 하였으며, 가야국 시조인 수로(首露)도 42년(신라 유리왕 19년) 금관국(金官國) 북쪽 귀지봉(龜旨峰)에 떨어진 6개의 황금알(金卵)에서 나왔다 하여 김()씨라 하였다.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三國史記第一卷新羅本紀一)에는 신라 3대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 6부를 개정하여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 양부)장 알평(謁平)에게는 이()씨를,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장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는 최()씨를,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 : 점량부)장 구례마(俱禮馬)에게는 손(<)씨를, 취산 진지촌(嘴山珍支村 : 본피부)장 지백호(智伯虎)에게는 정()씨를,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 : 습비부)장 호진(虎珍)에게는 설()씨를 사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사(北史)의 백제열전(百濟列傳)에 보면 사()·연()·예(?)·해()·직()·국()·묘()씨 등 8대성이 기록되어 있으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두 아들이 어머니 아유타국(阿喩他國)공주 허황옥(許黃玉)의 성씨를 따서 허()씨라 하였고, 고려 왕건은 고려 건국 개국공신인 홍술(弘述)에게 홍()씨를, 백옥(百玉)에게 배()씨를, 삼능(三能)에게 신()씨를, 복사귀(卜沙貴)에게는 복()씨를 사성하여, 각각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兼)으로 개명하였다.

      또한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귀화(歸化)하여 성을 얻었는데, 주로 중국계통이 많았다. 괴산점씨(傀山氏)와 김해김씨(金海氏) 우록(友鹿)계는 일본계통이고, 화산이씨(花山氏)는 안남(安南)계통, 연안인씨(延安氏)는 몽고(蒙古)계, 덕수장씨(德水氏)는 아랍계이며, 태씨(氏)의 일부는 발해(渤海)계통이고, 임천이씨(林川氏)와 경주설씨(慶州氏)는 위글(畏吾兒 : 오오아)계통이다.

      흥미있는 사실은 충주어씨(忠州魚氏)시조 어중익(魚重翼)은 원래 지씨(池氏)였는데, 태어 날 때 부터 체모(體貌)가 기이하고 겨드랑 밑에 비늘(鱗 : 린) 셋이 있어 고려 태조가 친히 불러, 보고나서 어씨(氏)로 사성했다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목천현 성씨조(木川縣姓氏條)에 보면, 태조가 고려를 건국한 후 목천 사람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자 태조의 미움을 사서, 각기 우(:소)·마(:말)·상(:코끼리)·장(:노루)·돈(:돼지)씨 등의 짐승이름으로 사성했는데, 후에 우()·상()·돈()·장()씨 등으로 변성(變姓)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성씨(姓氏)의 사회적의미(社會的意味)
  •   원시사회에서는 「토테미즘」으로 인한 특정동물을 씨족의 선조(先祖)로 모시는 종교적인 면이 있었으나, 문명이 발달하고 문자가 보급되면서 「토테미즘」이 점차 사라지고 특정성씨를 씨족의 상징으로 확정하게 되었다.

      중세사회에 이르기까지 성씨는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지배계급에서만 사용함으로써 정치적·사회적 신뭅계급의 상징이었으나, 오늘날에는 평등한 조건에서 누구나 갖게 됨으로써 인격존중의 사회적 진보가 달성되고 사회적 소속감을 갖게 되었다.

      또한 성씨는 씨족끼리의 일체감 속에 자기를 귀속(歸屬)·확인시켜 안정감을 갖게하고, 나아가서 민족유대(民族紐帶)를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며, 사회적 지위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예컨대 특정 성씨의 사회적 성공이나 출세는 그 성씨 모두의 사회적 신분을 높여 줄 뿐만 아니라, 특정 집단의 각성(覺醒)과 사명의식(使命意識)을 고취시켜 준다.

      이렇듯 성씨는 신성불가침한 자아성취(自我成就)의 도구로 여겨지며, 성씨를 중심으로 자신의 심리적 세계가 존재하게 되고, 개인적인 모든 활동이 성씨속에 결집(結集)되고 표출(表出)된다.

      따라서 개인의 업적이나 명예가 결국은 성씨에 부착되고 성씨를 통해 계승된다는 사실을 볼때, 성씨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부각(浮刻)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파벌(派閥)의 근거가 되고 동류의식이 강화됨으로써 폐쇄적인 족벌주의(族閥主義)가 나타나며, 개인을 한 집단에 매어놓고 희생시켜 발전과 개혁의 장애물이 되는 등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5. 성씨(姓氏)의 성장과정(成長過程)
  •   성씨의 수(數)와 종류(種類)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역사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대변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는 265성이 기록되어 있고, 조선 영조(英祖) 때는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이 지은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이, 조선 정조 때 아정(雅停) 이덕무(李德懋)가 쓴 「앙엽기(?葉記)」에는 486성이, 영조 46년에 편찬되어 정조 6년에 증보(增補)를 시작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조선초에 무려 4296성이었던 것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289성으로 줄어들었으며 다시 496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성씨에 관한 문헌으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양성지(梁誠之)의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 조중운(趙仲耘)의 「씨족원류(氏族源流)」, 정시술(丁時述)의 「제성보(諸姓譜)」 등이 있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30년 「총독부 국세조사(總督府國稅調査)」에는 250성으로 조사 됐고, 1934년 중추원(中樞院)에서 펴낸 「조선의 성명 씨족에 관한 연구조사」에는 326성으로 나타났다.

      1960년 국세조사에서는 미확인(未確認) 11성을 포함하여 258성이었으며, 1975년 국세조사에서는 249성으로 나타났다.

      또한 1985년 경제기획원(經濟企劃院)에서는 본관별 분류를 처음으로 시도하여 다각적으로 대대적인 조사를 하였다.

      이와같이 시대별 또는 자료별 차이가 튼 것은 대개 실제조사에 의한 것이 아니고 , 옛 문헌에 산재해 있는 것을 조사한 것이기 때문이며, 가구수와 호적별의 조사차이로 나타났다. 75년 인구조사에 의한 성씨분포도(姓氏分布圖)를 살펴보면, 김씨가 전체인구의 21.9%, 이씨가 14.9%, 박씨가 8.5%, 최씨가 4.8%로 4대성이 총인구의 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순위 20위 안에 드는 성이 80%를 차지하고 35여개 성이 90%, 90여개 성이 전체의 99%를 차지하여, 실제적으로 우리나라에는 249개 성(姓) 중에 90여개 성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나머지 160여개 성은 총인구의 1%에도 못 미치는데. 심지어 비()·선()·간()·응()·포()·방()·은()씨 등은 전국을 통하여 1가구 밖에 되지 않는다.


       참고 문헌 : 한국인의 뿌리 「나의 조상은 누구인가? 동래 정씨, 연일 정씨」,
                    한국성보편찬위원회(韓國姓譜編纂委員會), 정우사(正祐社), 1988.